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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06
폭동 스타일(강남스타일,땅크,광주,땅크상스,합필갤)

폭동 스타일(강남스타일,땅크,광주,땅크상스,합필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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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링크건 본문이나 읽고말하세요 애초에 "군인 독재정권에 맞섰다.군인들은 불법적으로 시위를 강제로 막았다."등 명백히 군사정권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Uprising"를 어설프게 대충 알아서 '반란'으로 간주하나 본데요 그런의미로만 해석될수도 없고 그런 성격이 강한것도 아닙니다
원례이건 고어에서 '일어남, 기립, 기상, 상승'을 의미했으며 나중에 근대이후 국민국가체제가 확립되면서 발생된 민중봉기등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새로 체택된것입니다. 즉 일어남이란 의미에서 봉기라는 의미도 추가된거죠 'popular uprising'를 대중폭동이라 안하고 대중봉기로 해석하는 이유입니다. 더군다나 유네스코 본문 자체가 상대방을 군사정권이며 방해했다느니 말하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봉기'세력을 민주주의로 명시하는데 문맥상 봉기입니다. 전체를 잘라서 일부를 가지고 그것도 표면적인 것을 가지고 폭동운운하며 펙트라고 주장하는것에서 북한식 선전선동술이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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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하기야 이남판 주체교도인 당신들 눈에는 자유민주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인 저조차 적으로 보겠죠 그런데 어쩌죠 제가 보기에는 당신들이야 말로 주체사상을 이남판으로 짝퉁질하는 사람들로 밖에 안보인는데요? 그리고 "객관적자료들과 앞뒤 안맞는 지들의 논지를 밝힐 생각은 안하고.."운운하신 분이 막상 올리니까 징징거리면 어쩌라는 것인지요 또한 민폐운운하기에 앞서 이딴 브금 올리것 자체가 이미 민폐이니, 큰 잘못은 저지른 이가 그것을 지적하는 이에게 지적질의 민폐운운하는것 또한 민폐에 민폐를 증가시킴이니 그 무례함이 크기짝이 없군요 당신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욕먹고 수치스러워지고 있는겁니다 최소한 당신들만 제되로 개념잡히면 국위선양되니 반성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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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7시위가 가열되는 초기과정: 5월 18일 9시 40분 뒤로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하기 시작한다.
오전 10시경에 전남대 정문에서는 휴교령이 내려진 줄 모르고 등교한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10시 15분에 반군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폭력진압을 감행하여 학생들이 유혈낭자 당하며 부상자가 속출한다. 이렇게 되자 20분부터 분노한 대학생들 800여 명이 교문에 배치된 반군들을 향해 투석하였으며 일부 학생들이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한다. 오전 11시경부터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시위하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진압 해산시켰다 그러나 정오부터 대학생들이 교문에서 뛰쳐나왔고 반군과 충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반군들은 시위와 연관 없는 시민들까지 무차별 폭행과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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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2.자유북한군인연합의 모순과 비논리:자유북한군인연합 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으며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발언은 사실이라 해도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주장의 증언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전혀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광주항쟁을 통해 흔들 기회조차 없었다는 소리밖에 안된다
그래서 아쉬워하고 태만했다고 비판하고 앞으로 당장 침투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의미밖에 안 된다 당시 정황상 5.18때 김일성은 머나먼 루마니아에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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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존경하고 기억하겠습니다"
-성 김(Sung Kim) 주한美國대사, 2012.8.3에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며 한글로 적은 방문록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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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26년 전 광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이 곳에 왔다"
"한국 민주주의의 업적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데다 문화중심 도시로 성장한 광주를 꼭 방문하고 싶었다"
"아내를 포함한 모든 일행에게 감동적 경험이었고 특히 나에게는 26년전 역사적, 희생자들의 개인적 비극을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美國대사, 2006.4.25, 국립5.18 묘지 참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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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국제자문위원회는 등재 찬성을 전원 만장일치를 했다.
세게기록유산측은 공식적으로 등재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 5·18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추적인 역활]을 하였으며,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며 민주화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라 한다. 즉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성장시켰고 그것이 일국을 넘어 동아시에 민주주의 확산을 하였으므로 인류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기록유산으로 만장일치로 인정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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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5.18 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이 책임을 가지고 상황을 자율적으로 통솔했다는 점이 대단했다." -성 김(Sung Kim) 주한 美國대사 2012년 8월 3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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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얻은 광주가 미국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할수 있는 부분이 많을것" "광주는 양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뒷받침이 되는 민주주의 가치를 강력히 공유하고 있다" “5ㆍ18의 민주화 정신, 한국의 민주화 발전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美國 대사 200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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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22.03.01익명

"용감한 희생자들을 추도하기 위해 깊은 존경심과 슬픔을 안고 이 곳에 왔다. 그들은 항상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고 그들의 기억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킬 것이다" -크리스토퍼 힐 주한 美國 대사 부부 2004년 9월 16일 국립5.18묘지 참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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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 등재된 제목에 Uprising이라고 적혀있는건 다들 아시려나?ㅋㅋ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 Human Rights Documentary Heritage 1980 Archives for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against Military Regime, in Gwangju, Republic of Korea (한국 국가기록원 외 여러 정부기관 부처 및 관련 단체 , 201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ttp://www.unesco.or.kr/heritage/mow/lis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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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광주 사태는 시작이 독재에 대항한게 아님 그리고 훔친 tnt 등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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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팩트는 이런거지
광주폭동군이 먼저 계엄군에게 발포한영상이 있단다
니가 직접 쳐 보고 판단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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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대표적으로 폭동을 의미하는 'riot'의 고어는 떠들다; 술 마시며 법석을 떨다.방탕으로 고어에서 부정적의미로 사용하다가 술집에서 마구 패싸움하는 것처럼 난잡하게 폭동을 행사하는 것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반대로 'Uprising'은 고어 자체가 일어남, 기립, 기상, 상승에서 연유하였지요 따라서 부정적 의미도 아니며 번역에서 '봉기'로 하는것은 당연한거죠 어원이나 확장된 의미모두 봉기니까요
반란, 반역, 폭동인 'revolt'의 경우 원례 천문학에서 별이 도는것이며 고어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세상이 뒤바뀌는 정치사적 사태인 혁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즉 배경자체가 하늘(천문관측)이 회전한다는 의미와 세상이 회전(혁명)한다로 확장된것처럼 Uprising도 마찬가지죠
(revolution으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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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미국의 독립선언에서는 거듭되는 평화적 청원에도 불구하고 폭력으로 거듭 답할경우 무력으로 천부적 권리 회복정당하고 말함 그럼 미국은 세계 최대의 폭도국가임? 자유민주주의에서 부당한 정부의 남용은 허용되지 않음 애초에 국가란 개인보다 못하거나 대등한존재에 불과한게 자유민주주의임! 그리고 애초에 맨윗글에 다 반박했는데 그글 읽지도 않고 펙트 운운은 토론의 자세가 안된것임 읽고 난뒤에 그것에 반박 하거나 미흡한점을 들어야죠
하기야 이러니까 제가 여러분들을 이남판 주체교도니 할게없어 북한왕국을 짝퉁질해서 이남버전으로 한다고 한탄하는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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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d)12.12는 군사 반란임 이미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반란으로 판결했으며 미국조차 반란으로 간주하며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통령까지 이에 분노하고 있다고 경고함 반란반역세력을 찬양하고 있는게 광주폭동 운운세력의 진실임이 펙트
e)법제정 문제이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절차상의 문제이거나 일부개인적 문제에 불과함 또한 명령없이 함부로 군대를 움직여 의회를 해산하고 대표자를 구금하며 나아가 그것을 지시한 자가 통령을 차지한것은 명백히 반란임.
그것을 정당화 하는 것은 김일성의 한국내전으로 남침도 정당하다는 소리밖에 안됨. 당시 휴전선에 남북간의 무력충돌이 많았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국제법에 반하여 함부로 군사를 움직여 침략한것이 뭐가 나쁘게 됨? 그런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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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a) 광주시민의 무장화는 진압군의 착검돌격과 실총사격 이후에 벌어진 사태임 그 이전까지는 아무리 심하게 무장해도 쇠파이프 정도였으며 그것도 착검돌격등이 벌어진 이후에 시작됨
또한 카빈총의 사살이 많았다는 실제 아님 카빈총으로 해야 폭도에 의한 살해로 분류되어 보상금을 받기에 검시위원회에서 최대한 카빈으로 분류했으며 그것조차 너무 적다고 공안의 압력을 가해
더 많이 늘였음이 팩트
b)시위대의 과격성이라 해보았자 애초에 정신적 문제를 가진 분을 죽이고 도서관에서 학생이 도망치다 죽는등 애초에 진압군의 과잉진압이 먼저였음
도청에 발포 이전에 이미 착검돌격과 실탄 무장으로 시민들 희생된 상태에서 버스 돌진등이 터진것이며 도청앞에서 모인 이들은 무장조차 안한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발포함 이것이 펙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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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폭도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무장하여 지프차를 타고 총기를 겨눈다

1980년 5월 22일 까지 최규하 대통령은 김대중에게 정권이양함을 동시에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고 유신헌법의 간선제를 그대로 유지할것을 협박을 한다 이에 응하지않는다면 전국적으로 무장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협박을 가하고 있다.

기관총 무장과 군무전기로 중무장을 하고있다. 어디 전쟁하려 가나?

폭도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현재 무기를 나누어주고있다.

무기고에서 나온 소총들 수많은 총기들이 나열되어있다.

폭도들이 뇌관,폭약,TNT,수류탄로 뭘 할셈인가?

대한민국 국무총리인 정홍원 총리는 518광주에 대해서 ''민중반란''이라고 보는견해다.

그는 과거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518특별법에 대하여 위헌를 내린 사람이기도하다.

폭도들이 현재 선량한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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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79년 10월 27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최규하 국무총리
''비상계엄령 선포'' ''계엄법 특정상 계엄사가 계엄주도''
이와 동시에 보안사령관 전두환 -> 10.26내란음모사건의 형사직으로 합동수사본부장 임명(최규하 본인) 여기서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
1979년 11월 6일 10.26내란음모 범인 발표 ''김재규''
1979년 12월 6일 유신헌법 간선제로 최규하 대통령 선출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총장 연행사건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 대통령 정부 공식출범
1980년 4월 사북사태 발생 강원도 노조간 파업문제에서 경찰관1명 순직 민간인 4명 부상자
1980년 5월 15일 서울사태 발생 경찰관4명 순직
1980년 5월 17일 ''전국비상 계엄확대'' 선포
1980년 5월 18일 광주폭동 광주내란 발생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설치

5월 21일 폭도들이 무기고를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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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체포하다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구테타로 볼수없다. 따라서 광주폭동의 정당성은 없다.

정승화체포조사는 정당했고 대통령에 대한 재가는 사실상 받을 필요가 없는 보고 사항이었다는게 팩트

e) 12.12 518 특별법 제정의 문제점

518특별법은 헌정사상 유례없는 말도안되는 소급입법이다.

5인이 반대, 4인이 찬성하여 위헌판결을 내린 재판관이 더 많았지만 6:3이어야 폐기시킬수 있다는 한국의 제도 때문에 통과되버린게 팩트

반대했던 5인중에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가 있었던게 팩트

f) 북괴 유입 공작

지만원 박사의 폭로로 만천하에 드러난 북한 개입설. 최소한 북한에 의해 시위가 무장 폭동수준으로 격화됐다.

수많은 탈북자 증언, 북한에 존재하는 518기념비, 기록에 의한 정체불명의 무리들, 일반시민 수준을 넘어서는 총기무장 운용능력 등의 증언

광주사태 보상금 타먹고 월북한 윤기권 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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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a) 총기무장

광주 민주화운동의 총기무장 약탈 파괴는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넘어선다. 전세계적으로 전례가 없음

광주의 총기 탈취와 난동은 미리 계획 되었고 사망자의 다수가 시민군이 소지한 카빈에 의해 사망했다는 점이 팩트

b) 누가 먼저 공격했는가 - 폭력의 시작

시위대의 과격성 공격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일방적인 진압군 매도. 당연한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순성

진압군의 도청앞 사격전 시위대가 버스로 난입해 진압군 병사들이 깔려죽었다는게 팩트

c) 518은 김대중 구명운동이다.

518은 민주화 시위가 아닌 당시 정치적 상황을 전혀모르던 무지함에서온 오직 지역감정에 의한 김대중 구명운동의 일환이었다.

김대중과 제야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합법적인 정부가 협박 당하던 상황이라는게 펙트

d) 12.12 는 구테타가 아니다.

대통령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 정승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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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seth2이색끼 밴좀해라,
왜 여기서 ㅈㄹ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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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등신아 브금사이트에 이딴댓글 싸지르지마라 개민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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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광주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의 경우 5월 22일 17시 00분 광주광역시 송정동에 주둔해 광주를 봉쇄하던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통합 병원 확보 명령을 받고 진압시작 했다. 이 작전 도중 광주 시민군과의 교전이 발생하여 시민 8명이 사망했다.->그나마 시민군과 충돌과정 사망(대다수 계엄군 사망은 아군오사였다)광주 변전소 확보 작전에서도 31사단의 일부 병력은 23일 10시 00분 작지 80-7호에 의거 광주 시내 변전소 확보 지시를 받았다. 변전소에 주둔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몇 명이 사망했다. 계엄군 간 오인사격전도 있는데 일명 송암동 학살이다
개요는 24일 이동하던 11공수여단과 보병학교 교도대 등 계엄군간 오인사격전이 벌어져 계엄군 9명이 사망하였다 민간인 측은 효덕초등학교 뒤 놀이터에서 놀던 전재수, 부근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놀던 방광범은 총격을 받아 살해되었고 오인 총격 이후 반군들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을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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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1공수부대 62대대 5지역대 소속 병사 몇 명이 부상자 3명 중 남자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는데 국방부 과거사위의 관련자 면담에 따르면, 본부의 모 소령이 부상자를 데려온 것을 책망하자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지대 모 중사 등 3명이 부상자를 처리했다는 것이다 지원동에서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이외에도 국제 교전수칙을 무시하고 적십자 활동을 하고 있던 차량에 대한 발포한 사건, 트럭 운전사를 살해한 후 너릿재 터널에 트럭을 밀어 넣고 소각한 사건도 있었다.호남고속도로 및 광주교도소 봉쇄작전에는 21일 오후부터 3공수여단이 배치된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심지어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한테도 발포되었으며,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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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1.민간인 학살:광주-목포 도로 봉쇄에서 20사단 61연대 2대대는 21일 오후 4시부터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 21일 밤 광주시로 들어오는 차량에 발포하여 시민 3명 살해하고 1명을 포로 잡았다고 보고했다. 나중에 밝혀진 피해자의 수는 8명 정도로 이 보다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광주-화순 도로 봉쇄작전에는 21일 오후 7공수여단 , 11공수여단는 광주광역시 시내에서 철수하여, 배치됐다. 5월 22일에 차량 등으로 바리케이드 설치중인 민간인 등을 살해하였고, 5월 23일 11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이 발생하여 17명이 학살당한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에는 손옥례, 고영자, 김춘례, 박현숙 등 10대 여성 4명도 포함되었는데, 당시 손옥례의 시신에서는 대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좌유방자창이, 박현숙의 시신에서도 자창이 발견되어 당시 얼마나 끔직 했던 만행인지를 확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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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0시민저항권이 발동되기 시작함:연속되는 시민에 대한 살해 이후 무장움직임이 그제서야 시작됨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이 결성된다.15시 48분에도 반군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하고 있었다. 이에 16시부터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진출하여 시가전을 전개하였고 43분에는 학생들이,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하고 공격하였다 ->저격으로 확인사살중인 계엄군에 대해서 자위권 발동함/7시 30분부터 공수부대들이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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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분노한 시민들은 금난로를 지나 전남도청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13시 정각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높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시민을 향하여 일제히 총구에 불을 내뿜으며 집단발포를 개시하였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피가 마르지도 닮지도 않았다 애국가가 끝난 이후에도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국민 한명 한명을 정조준하고 선택하여 사살해버린다.
20분이 지나도 시민들은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지며 무차별적으로 도축당하고 있었다.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시민에 대한 대량살해시작됨, 여전히 시민들 비무장상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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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9.분노하는 시민들:5월21일 무차별 발포로 시민희생이 발한 다음날, 0시 35분에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하였는데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반군들은,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하였고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하였다.->시민살해, 계엄군 사망없음/ 4시경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살해당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로 분노의 행진을 개시하여 30분 뒤에 광주KBS 건물을 방화하였다 8시부터 시민들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하였으며 10시 15분부터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12시 10분경에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후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시민 4명이 살해당했다->시민 다수 살해, 계엄군 사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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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반군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21시 50분에 광주MBC를 방화했다 23시경에 광주역 광장에서 반군들이 무차별 발포하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살해됐고 시민 수십 명 부상당하였다->발포시작 민간인 살상자 다수 발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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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8:계엄군의 폭력확산:20만 명이 5월 20일,시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반군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10시 20분에 반군들은 가톨릭 센터 앞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고 와 마구잡이 구타 20시 부터 3공수여단장이 실탄 장착 지시했으며, 11공수의 경우 각 각 61대대,62대대가 1000여발 분배하였다 또한 이러한 분배 과정에 대검을 사용하였다 21시경에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이 사망하였다->군대 실탄장전완료 이후 저지선돌파로 경찰 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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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5시에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하였음에도 16시 30분에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비무장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을 향해 실탄사격을 하여 부상 입힌다 ->이제서야 시위대가 각목만듬, 비무장 고등학생 실탄으로 피격당함/20시부터 시민 수만 명이 십대까지 발포하는 학살행위에 분노하며 2백 대의 택시가 전남도청 앞에 결집,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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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9일 오전3시부터 11공수여단이 증원으로 광주에 도착했으며 금남로에는 대학생·시민 20003000명이 나와 군경과 대치했다 곧 그들은 시민들을 향해 착검돌격하고 개머리판으로 폭력을 가하며 진압을 시도(이 과정에 김경철분이 병원에서 사망했음) 착검돌격에 의한 민간인 학살->9시 30분에 시민들은 이러한 잔혹함에 분노하여 임동, 누문 파출소를 방화한다. 10시에는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에 11공수여단 위력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시민을 향해 돌격, 공격하며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이에 오후부터 시민들은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했으나 무장력이 현저히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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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6시위발생 이전에 이미 군대투입: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에 진입하여 주요거점을 점령하였다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으며 5월 17일 제7공수부대는 광주에 진입,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점령했다. 이로써 17일 광주시내와 각 대한에 7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가 진주한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검속을 감행하였고,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되자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선포되어졌다 이 과정에서 5월 18일 0시경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분이 반군에게 쫒기다 옥상에 추락사하며 5.18최초 사망자가 되었다->반군에 의한 민간인 사망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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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5윤기권씨를 보라 빨갱이에 간첩들이 민주항쟁 투사다?:윤기권씨는 보상금을 받았고 나중에 월북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분 말고 월북한 분도 없고 당시 상황을 무시한 논리비약이다 5.18일 당시 윤기권씨는 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이로 17살밖에 안된 청소년이었다.
5 18항쟁으로 인해 계엄군에게 총상을 입었으며 개같이 끌러가 고문을 받았다
그 후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리다 5월이면 미친 듯이 광주 그림에 몰두했다결국 그는 1991년 1월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금 2억 원을 수령 후, 노모에게 광주 보상금을 건넨 뒤,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영국 대사관을 통해 월북했다.여기서 허위사실과 달리 돈을 갖고 북한으로 간적이 없으며 2차가해의 피해자한테 간첩 드랍질 하는 것은 몰상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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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왜냐하면 M16 총상 사망자는 군에 대항한 것으로 인식돼 폭도로 분류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한다.검안위원회에서 최초로 폭도로 분류된 사람은 20여 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해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진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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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4.시민군에 위한 희생자가 더 많다?:일부 자칭 보수세력 단체들은 제5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광주 시민 중에 계엄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M16보다 시민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카빈에 의한 희생자가 더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따라서 당시 시민에 대한 학살이 아니라 폭도들에 대한 자위권 발동이라고 논리비약을 행하는데 이는 심각한 허위사실이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오히려 이것마저 조작되었으며 M16에 의한 사망자가 더 많았음이 밝혀진다.5.18 민주화운동이 종료된 뒤, 의사·검찰 관계자·보안사 요원이 작성된 사체 검시 자료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6월 중순 보안사 주재로 사체 검안위원회가 열려, 피해자 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M16에 의한 사망자보다 카빈에 의한 사망자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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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3.간첩난동의 선동 실체:북한군 40여명이 사살되었다느니 북한군이 민주항쟁 열사로 둔갑되었다느니 고정간첩으로 남았다느니 말은 허위사실이다. 신군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이후, 부상자와 연행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공 판단서를 첨부하였으며 대공 용의점에 대해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단 한 사람도 이상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또한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음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신원미상 사망자는 11명이이었지 40명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2002년에 DNA 검사를 통해 6명이 가족을 찾아 현재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는 5명으로 줄었다.그리고 자유북한군인엽합이 기자회견에서 사진으로 증거 제시된 신원 미상자는 임00라는 분으로, 이분이 5월 22일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외삼촌인 손00씨가 총에 맞아 쓰러지니까 외삼촌을 구하러 갔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분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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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당시 계엄군은 애들까지 사살할 정도로 극도로 민감하여 심지어 아군 오사까지 벌일 판인데 소속불명의 군대가 활개 치는 게 불가능하다 발포기록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다 또한 당시 광주시민들은 보안의식이 투철하였다 조갑제씨의 증언 되로 김일성은 오판 말라며 반공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80년 5월 당시에도 계엄군이 북한 간첩 침투 설을 흘리는 바람에 시민들이 거동이 수상한 사람 2명을 계엄군에 넘겨주는 일도 있었다.계엄군이 그들을 간첩혐의로 고문수사를 했지만 혐의를 발견하지 못해 계엄법 위반으로 처벌받았고, 81년 4월에 두 분 이 다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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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더군다나 다들 배우라서 직접들었다느니 고위간부가 말해주었느니 말하는데 어떻게 된 게 서로 말이 일치되지도 않는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 대표는 “그 때 광주에 내려왔다가 2/3는 못 돌아갔다”라고 말했는데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씨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라 말하며 숫자가 일치되지도 않는다. “당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파하는 군인들을 보았다.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한국군 전투복 차림의 M1 총을 낀 사람들이었다. 한 번에 8~12명까지 이동했다”고 주장했는데,
봉기자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라는 주장과 모순적이다
한국군 차림의 사람들이 시위대 사이에 들어가 이간질이 가능하지 않다 더군다나 시내 발포상황은 상방기록에 일치되며 시외에서 벌어진 발포조차 일치한다.
소속미명의 군인의 발포는 확인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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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북한특수부대 투입의 비논리:주한미군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분석에 따르면, 5월 초부터 5월 18일까지 북한의 특이 동향이 감지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감시기까지 띄우며 북한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김일성은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루마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이 5.18을 인식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광주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더군다나 과거에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등에서 훨씬 적은 숫자의 병력도 주민신고에 의해 발각되거나 동선이 노출되기 쉬웠는데 하물며 수백 킬로미터를 일개 600여명을 투입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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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이와 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 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 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 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법률위반(뇌물)”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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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질서 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 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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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성김 주한미국 대사의 예방에 광주시장은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록 신청시 미국 국무부가 보관하고 있던
5.18관련 자료를 보조 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협조해 준 데 대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즉 美國 국무부가 외교적으로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에 협력한 것을 감사했다는 뜻으로 미국대사는 거듭 광주와 협력할것을 응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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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1989년 광주를 한차례 방문했고 한국의 민주화과정이 이렇게 역동적일 줄 미처 몰랐고
열사들을 추모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민주화 운동을 생생하게 보고 느꼈고 광주를 잊지 않겠다”
“대한한국이 짧은 기간에 민주화를 이뤄낸 것이 너무 인상적”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의 표상이 될 것”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美國대사, 200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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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el 20빌리둘기·18.10.03

디씨 합갤에서 먼저봐서 그런겁니다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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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8.10.03익명

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 하지 않을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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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5.11.29익명

다들 닥쳐라 똥멍청이들아 여기서 니네만 떠들면 뭐가달라져 대가리에 마군만 낀세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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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5.04.18익명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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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15.01.24익명

광주는 폭동이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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