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악의 원자력 참사가 발생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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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

1960년대, 전후 2차세계대전의 상처를 딛고 미국과 양강 체제를 구축한 본격적인 냉전에 돌입했다.

인류의 과학 기술은 더 넓은 우주로, 더 작은 원자로 향했으며, 그중 대표적으로 열거할 수 있는것이 스푸트니크와 유리 가가린, 원자력 발전소와 차르 봄바였다.

소련은 원자력 발전소의 어마무시한 발전량이 비대해지고 있는 소련의 인구와 공업을 위한 훌륭한 발전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소련만의 생각이 아닌 미국, 프랑스, 영국. 그리고 한국조차 가지고 있는 전세계의 이상이었다.

소련은 키이우와 그 주변도시에 전기를 위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한때 그 위치는 키이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최종 선택될 뻔 했지만 이후 위치는 다시 옮겨져 키이우에서 100km 떨어진 북쪽, 힌반도 보다도 넓은 핀스크 습지 숲속에 벨라루스 국경에 인집한 프리피야트 강가로 정해진다.

프리피야트 강은 우크라이나의 주 수원인 드네프르강의 지류로 폴란드와 벨라루스를 거처 우크라이나에 도달, 드네프르강과 합류하여 키이우와 헤르손을 지니 흑해로 흘러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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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로운 계획을 이끌어 나갈 책임자로 빅토르 브류하노프(러시아어: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Бруханов)가 임명되었다.

그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전기공학자로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4남매중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덕에 타슈켄트 공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1966년, 그는 슬라뱐스카야 화력 발전소에 배속받았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하여 부수석 엔지니어의 자리에 도달했으며, 그가 발전소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번 발전량 목표를 초과 달성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당원이었고, 슬라뱐스크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1970년, 빌전소 건설 책임자를 제안받고 원래 직을 사임한다.

부임한 그는 발전소 계획을 세우며 RBMK 원자로 대신 가압경수로 형태의 발전기를 설치하길 주장했으나, RBMK가 경제적으로, 안전성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방식보다는 우월하다는 의견이 주류가 되어 건설될 발전소의 원자로는 RBMK가 설치되게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가 지어질 체르노빌 지역은 냉각수를 확보하기 용이한 프리피야티 강가였으나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숲속이었기에 교통 인프라도, 출퇴근할 도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은 이곳을 발전소와 함께 발전소에 근무하는 인력과 그 가족들, 그들을 뒷받침할 이들과 산업이 존재하는 신도시로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렇기에 빅토르는 발전소 인근 남북으로 프리피야티와 체르노빌이라는 2개의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프리피야티는 근처의 프리피야티 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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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획을 바탕으로 키이우 국영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맏은 빅토르는 선정한 부지에 도로 인프라와 철도역을 건설하고 1975년 운영 시작을 목표로 1972년 8월에 발전소를 기공하는 한편, 계획대로 건설 노동자와 발전소를 운영할 노동자들을 위해 도시도 함께 건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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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중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기념 원자력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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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중인 프리피야티의 아파트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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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여느 아파트들 처럼 프리피야티의 아파트들도 위 사진과 같이 조립식으로 건설되었을 것이다.)

허나 그 계획은 차질을 빗기 시작하는데 소련의 구조상 필요한 자재가 제때 도달되지 않거나 도둑들이 자재를 훔쳐가는 등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 즉, 돈은 층분해도 자재를 못구해서 건설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소련 상층부는 지지부진한 건설 과정에 대해 브류하노프에게 문책을 해왔지만, 브류하노프는 "원하는 자제를 주면 시키는데로 하겠다!" 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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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기의 격납 용기 안)

다행이 이 반박이 통했고, 그 덕에 공사는 이전보다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겨우 1977년이 되어서야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기념 원자력 발전소의 1호기가 완공되고 78년이 되어서야 상업 운전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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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기 방향에서 본 발전소 전경)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기념 원자력 발전소는 소련의 가장 야심찬 원자력 발전소로 1, 2호기에 뭠추지 않고 3호기와 4호기, 그리고 추가 부지에 5호기와 6호기를 건설, 더 나아가 강 넘어에 추가 발전소를 건설해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소가 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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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피야티는 또한 소련의 가장 야심찬 신도시 계획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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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도시공학자들은 프리피야티를 세심하게 설계하여 소련에서 가장 이상적인 신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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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중앙에 폴리샤 호텔을 비롯 수영장과 복합 문화 시설인 에네르게틱 문화 궁전, 수영장과 같은 주민 편의 시설을 건설하여 도시 안에서 가능한 모든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인구는 해마다 늘어 목표인 7만여명을 1990년대가 되기 전에 달성할 수 있으리라 예측할 수 있는 정도였다.

1986년 1월의 프리피야티는 평균 연령 26세의 약 5만명의 인구와 그를 수용하기 위한 160채의 아파트와 기타 주거 시설, 유치원 및 초등학교 15개와 중고등학교 5개, 최대 410명을 수용 가능한 병원 3개, 25개의 쇼핑몰 혹은 상점, 27개의 카페 혹은 레스토랑, 10개의 체육관과 3개의 실내 수영장. 그리고 5부 리그 팀의 홈구장인 아방가르드 스타디움을 포합한 종합운동장 2개 등을 갖추고 있았다. 더 나아가 거주민을을 위한 놀이공원또한 86년 노동절에 개장하기 위해 건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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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와 도시는 위기를 겪고도 빠르게 성장중인 신도시로서 앞으로의 미래도 밝을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밝은 모습 내면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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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부터 발전소 소장 빅토르 브류하노프, 발전소 차석 기술자 아나톨리 댜틀로프, 발전소 부소장이자 수석 기술자 니콜라이 포민)

빅토르 브류하노프는 전기공학자였고 화력발전소 근무 경험밖에 없는 인물로 원자력에 대한 이해는 전무한 인물이었다. 그는 발전소 뿐만 아니라 프리피야티의 확장과 도시와 관련한 행정 업무들로 과로 상태였다.

이와 동시에 발전소 건설과 초기 운영을 함께한 이들은 흩어져버려 실질적으로 발전소 운영을 이끌어 나갈 기술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부소장으로 취임한 니콜라이 포민 역시 전기공학 전공자로 원자력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취임 이후 통신 강의로 핵물리학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관련으로 바쁜 브류하노프 대신 발전소의 실질적 책임자가 되어야 했다.

그나마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공학과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원자력 잠수함의 원자로 설치에 참가한것을 계기로 원자력 분야에 종사하기 시작했으며 1973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원자력 발전소에 부임하게 된다.

그는 이 발전소의 1호기부터 4호기의 운영 과정에 모두 참여했으며, 그를 제외한 실무진과 경험자들이 모두 떠나간 발전소에서 그나마 원자로에 대한 이해가 있던 인물이었다.

비록 그가 성과주의자로서 부하들에게 강압적인면을 보인적이 있었을지언정, 그는 실무진중 최고참이자 운영에 관여하는 인물들중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인물로서 발전소 직원들에게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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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기와 4호기 건물, 독립적 건물로 건설된 1, 2호기와 달리 한 건물에 굴뚝을 중심으로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원자력 발전소는 1982년에 1호기가 노심 용융 사고가 발생하여 사건 이후 설계 출력인 1000MW에서 800MW로 하향 운영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적이 있었다. 다만 이것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기념 원자력 발전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것 외에도 당시에 RBMK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고들의 교훈은 폐쇄적인 체제 하에서 공유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이 발전소와 도시는 다양한 이유로 건설이 늦춰줬고, 빅토르는 그걸 무마하기 위해 여러 단계를 무시하면서 3호기와 4호기를 완공했다. 그 결과로 관련 인물들은 소련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상태였다.

그 무시된 단계중 하나는 비상시에도 원자략 발전소 운영이 안정적으로 가능한지에 관한 내용으로, 포민은 이에 대한 실험을 완료하기 이 실험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실험의 내용은 이러했다. 모종의 이유로 원자로의 냉각 시스템을 유지하는 전력이 차단되었을때, 비상 디젤 발전기가 충분한 양의 전력을 공급할때까지 터빈이 관성으로 회전하며 충분한 양의 전력을 생산하는지 확인하는 안전 테스트였다. 이를 위해서 원자로가 생산하는 전력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키는건 필수였다.

빌전소의 상업 운전 이후 여러번 시도되었던 이 실험은 번번히 실패했고, 1986년 4월 15일 오전까지 밀리게 된다.

그러나 그날 예정대로 원자로의 안정장치를 해제하고 테스트를 위해 원자로의 출력을 낮췄지만, 키이우의 전력 관리자들은 급증한 전력 수요에 맞춰 원자로의 출력을 높이길 요구했다. 실험은 내부자들끼리 비밀리에 실행할 수 밖에 없었음으로 그 요구를 수용하고 실험은 다시 늦춰지게 된다.

결국 날이 지나 4월 16일 새벽, 댜틀로프의 감독하에 낮 시간대의 근무자들보다 낮은 숙련도를 가진 근무자들과 함께 실험이 시작된다.

그리고 1시 23분 45초, 인류 최악의 원자력 재난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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